나는 14살, 주방의 식재료를 나르던 풋내기 시절에 폴 보퀴즈Paul Bocuse 셰프를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나는 리옹에 있는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인 낭드롱Nandron에서 수습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을 시작하고 2주 뒤에 같은 거리에 있는 레알Les Halles de Lyon에서 폴과 마주쳤다.
낭드롱의 사장인 제라드 낭드롱Gerard Nandron 은 폴의 친한 친구였다. 그 날은 L’Auberge du pont de Collonges에서 케이터링 업무로 바쁘게 보내던 날이었다. 업무가 대충 정리되고 낭드롱과 나는 강 건너에 있는 폴에게 인사차 들렸다. 레 알에 도착하자, 폴은 “이 어린놈에게 줄 코뮈나communard 좀 내와”라며 웨이터를 불렀다. 15살밖에 안 소년이었지만, 남자답고 정중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나는 술잔에 가득한 술을 다 마셔버렸고, 다시 일하러 돌아갔을 땐 고주망태가 돼버렸다.
이 일이 있고 난 뒤부터 나는 폴의 레스토랑에 일손이 부족할 때마다 찾아가 일을 도울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주방에 들어설 때마다 엄격한 규율에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도 폴의 레스토랑은 세 개의 별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여러분은 별 세 개의 레스토랑에서 풍기는 순도 높은 긴장감이 무엇인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실제로 느꼈다.
직원 모두는 완벽을 추구하는 주방장의 철학, 관대함, 요리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나무 장작을 핀 벽난로에서는 오리와 닭이 구워지고 있었고, loup en croute 와 lievre a la royale 같은 요리들이 항상 큰 은쟁반에 담겨 제공되었다. 폴은 음식을 어떻게 즐기는 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클래식한 모습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창의적인 사람formateur이다.
몇 년이 지난 뒤 나는 조르쥬 블랑Georges Blanc과 함께 리옹을 떠나 새로운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고향을 벗어나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신기하게도 요리사들이 모이는 장소마다 폴이 있었다. 내가 로제 베르쥬 Roger Verge 와 일을 할 때도 폴은 그곳을 방문했었고, 그는 항상 나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심지어 내가 덴마크에 있을 때도 폴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를 정도다. 우리는 우연히 마주쳤던 적이 많았다.
1982년 뉴욕의 웨스트 뷰리 호텔에서 일할 때도 폴을 만날 수 있었다. 호텔 매니저가 폴의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폴과 로제, 그리고 가스통Gaston Lenotre 은 항상 그 호텔에 머물렀는데, 뉴욕에 머물던 때에 폴과 자주 연락할 수 있었다. 그가 올랜도에 있는 프랑스 마을French pavilion에 레스토랑을 열었을 때만 해도, 파리에서 올랜도로 오는 직항 항공편이 없었다. 그는 올랜도로 가기 전, 항상 뉴욕에 들렀다. 이때 나는 뉴욕의 Plaza Athenee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폴은 그의 60번째 생일 파티를 플라자 아테네에서 열었다. 감사하게도 내게 그 연회를 지휘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졌다.
폴의 파티가 끝난 후 레 씨르크Le Cirque에 초대되었는데 기억으로는 식사는 괜찮았지만 꿩 요리는 너무 오버 쿡 되어있었다.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폴과 로제 베르쥬는 레 씨르크의 주인인 시리오Sirio에게 나를 새로운 주방장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내가 레 씨리크에서 일하게 된 후 폴과 더 많은 연락을 주고받았다.
내가 유명하게 된 계기가 된 농어 요리는 사실 폴의 감자크러스를 입힌 노랑촉수(Rouget, Red mullet) 요리가 베이스였다. 거기에 지라르데의 주키니 비늘을 입힌 노랑촉수 요리로부터 영감을 더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 레스토랑인 다니엘Daniel을 열었고, 지금 다니엘이 있는 65번가로 옮긴 그해 봄, 리뉴얼을 축하하기 위한 갈라디너에 여러 명의 셰프를 초대했다. 수습생 시절 스승이었던 제라드 낭드롱, 조르쥬 블랑, 미셸 게라르, 로제 베르쥬, 폴 보큐즈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사실 폴은 나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다. 항상 나를 돌봐주었고, 매년 폴의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공감대를 유지했다. 그리고 폴의 아들 제로미는 CIA의 학생이었고, 그와도 좋은 친구로 남아있다. 이제는 내가 제로미의 대부가 되었으니, 우리는 진짜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가 됐다.
폴과의 인연을 돌아보니, 우리는 같은 지역 출신이고, 요리와 삶에 있어서 같은 언어로 소통한다는 점이 서로를 끌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음식 앞에서 우리는 행복했고, 가치있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로부터 전통과 열정의 원동력, 그리고 집중하는 법 등을 배웠다. 또한, 즐겁게 일하는 것의 중요성도 알게 됐다. 내가 아는 요리사 중의 파티광 원조는 아마 폴일 것이다.
사실 뉴욕의 셰프들은 높은 업무 강도 때문에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바쁜 시간을 쪼개 동료들과 어울리기를 마다치 않았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나에게 자극이 된다.
폴은 요리의 교황이라 불린다. 프랑스 전역, 유럽 그리고 일본과 미국에는 그의 친구들이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일본 요리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기 전인 60년대부터 일본을 오가며 교류를 했다. 사실 프랑스 요리에 일본식 기술이 접목된 것에서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요리를 갓 시작했던지, 나처럼 꾸준하게 업계에 남게 되든지 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폴의 레스토랑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폴처럼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전통의 숭고한 의미를 현대적인 예술로 변화시키는 작업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가치에 존경을 담아 유지할 필요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는 현대적인 것과 유행을 구분할 줄 알고,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레스토랑이 지금도 사랑받는 이유다.
아직도 그와 통화를 하거나 만나면, 여전히 세계 미식의 흐름을 알고 싶어 하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뉴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젊었을 때의 폴을 느낀다.
· 셰프뉴스에서 보기 : http://chefnews.kr/archives/12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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